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400번의 구타> 결말 해석, 원심력, 공간, 자전적 영화, 타자기의 상징

by wakey 2023. 6. 1.

프랑수아 트뤼포의 1959년 작 <400번의 구타>. 이 영화는 한발 더 밀고 나가 그것은 트뤼포의 자전적인 측면과도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비롯하여 타자기의 상징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의 결말 해석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보겠다.

400번의 구타

<400번의 구타>는 원심력의 영화 

<400번의 구타>는 원심력의 영화처럼 보인다, 가볍게 말해 원심력이란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원의 중시믕로부터 멀어지려는 관성력이다. 물론 영화에 묘사되는 동선이 정확히 원을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어떤 힘 같은 것이 영화에 녹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관점에서 원심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면 이제 원심력에 대한 세 가지 정도의 예시를 말해보겠다. 먼저 놀이기구, '앙트완'과 '르네'는 학교를 땡땡이치고 거리를 여기저기 배회한다. 그러던 그들은 놀이공원 같은 곳을 방문하게 된다. 앙트완은 원통형의 기구에 탑승하게 된다. 이들의 움직임이 바로 원심력이다. 감독이 강조라도 하는 듯 이 장면을 꽤나 길게 보여준다. 다음은 체육시간, <400번의 구타>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소는 학교이다. 이 중 체육시간의 조깅 수업을 통해 중심으로부터 튀어나가는 힘에 대한 센스 있는 연출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결말 장면인 앙투와는 소년원을 탈출해 달리는 모습은 힘의 작용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일까? <400번의 구타>는 앙트완이 '어른들이 만든 세계'로부터 반복해서 이탈하는 영화이다. 한 발 더 밀고 나가 그 세계에 현미경을 대고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규율과 속박의 질서가 팽배한 제도권 정도가 될 것이다.


공간의 영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공간의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앙트완을 경유해 묘사되는 공간을 순서대로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학교에서 집, 르네의 집, 아버지의 직장, 경찰서, 소년원. 우선 학교, 경찰서, 소년원은 이미 훈육의 공간임을 알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국가기관 뿐 아니라 집에서 역시 어른들의 규칙이 작동하고 있다. 학교 교실에서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직장에서 경비에게, 소년원에서 관리자에게 앙트완은 거칠게 맞는다. 말하자면 <400번의 구타>에서 앙트완이 가장 자유로움을 느끼는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파리의 길거리이다. 물론 이러한 영화의 기조에 대해 기성세대에 대한 트뤼포의 에두른 비판이라는 해석이 많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번의 구타>는 꽤나 중립적인 입장의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앙투완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며 근근이 살고 있는 노동자 계층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아들에 대한 그들 의결여가 조금 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른들은 아이를 기르기에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완전히 비난만 받을 수도 없게 영화는 그려낸다. 쉽게 말해 감독은 '기성세대는 나쁘다'라는 무리한 일반화를 적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성세대에 대한 개인의 견해를 최대한 배제한 체 그저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삶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앙트완의 비극에 대해 특정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게 되면서 관객들은 이 상황에 대해 사회구조적 혹은 더 나아가 국가적 차원에서의 동인을 고찰해 볼 수 있게 된다.

 

자전적 영화, 타자기의 상징 

영화 초반의 에펠탑 장면을 보면 낭만의 도시로 대표되는 파리의 랜드마크인 에펠탑에서 수많은 앙트완의 삶이 녹아 있는 파리의 단면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낭만적일지 몰라도 그 이면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발 더 밀고 앙트완의 이야기는 트뤼포의 자전적 스토리와도 많은 부분 결부되어 있다. 실제로 트뤼포는 영화 속 앙트완처럼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그 시절의 유일한 해방구가 문학, 영화였다고 한다. 사실 영화만 봐도 이미 자전적 이야기라는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몇 가지 장면이 있다. 먼저 타자기. 앙트완과 르네는 돈을 조달하기 위해 앙트완의 아버지 줄리엥의 사무실에 몰래 잠입한다. 그곳에서 줄리엥의 타자기를 절도한다. 이 사물의 용도가 인상 깊다. 앙트완은 영화에서 딱 한 번 학교 수업에 의욕을 갖게 된다. 그것은 작문 과제이다. 당시 발자크에 매료되었던 소년은 표절이긴 하지만 나름 그것을 인용해 호기롭게 숙제를 제출한다. 그런데 그 과제는 베꼈다는 이유로 낙제 처리가 된다. 심지어 선생님은 그것을 아이들 앞에 공개함으로써 모욕을 준다. 만약 선생님이 앙트완에게 조금 더 긍정의 시그널을 주었다면 어쩌면 소년은 작가의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이로써 타자기는 절도의 도구 또는 꿈의 결론, 노동의 수단이다. 또 다른 장면인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앙트완의 가족 장면에서 앙트완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에 영화라는 것은 해방이자 행복감이라고 표현된다.

 

결말 해석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두 감흥이 동시에 동작하고 있다. 소년원을 탈출한 앙트완은 달리고 또 달려서 바다에 도착한다. 바다는 르네와 아트완이 해방을 꿈꾸며 그리던 장소였다. 어쨋든 앙트완은 자유의 언저리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바다의 물살로 인해 회귀하는데, 이것은 자유와 자유의 불가를 나타낸다. 지구 자전으로 인한 원심력의 산물을 마주한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롭다. 직후 앙트완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카메라는 그를 피사체로 담으면서 정지시킨다. 이 장면 역시도 영화가 주는 중단과 해방 불가에 대한 인정을 나타낸다. 

댓글